1년 만에 강등권 원딜러에서 세체원이 되는 법

전화위복(轉禍爲福).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이다.

EDG 소속으로 2021년 롤드컵을 우승하며 세계 최고 원딜러로 거듭난 '바이퍼' 박도현에게 가장 어울리는 사자성어다.

2017년 '그리핀'에서 원거리 딜러로 데뷔한 박도현은 지금까지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 정규 시즌에서 보여준 압도적 경기력에도 불구하고, LCK에서만 세 번 준우승했다. 그중 한 번은 본인의 본헤드 플레이가 주요한 패배 요인이었다. 2019년 롤드컵에서는 펜타킬을 달성하는 저력을 보였지만, 결국 8강에서 IG에게 패배하면서 고배를 마셨다.

롤드컵 이후에는 "그리핀 사태"에 휘말리며 성적과 폼이 동반 추락했다. 준우승팀이 바로 다음 시즌에 2부 리그 강등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2020년 서머 시즌에는 한화생명e스포츠로 이적했으나, 최하위권인 9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이 모든 게 단 1년 전 일이다.

2020년으로 돌아가 "2021년 세계 최고 원딜러는 바이퍼"라고 말한다면 누군가 믿을까? 그러나, 바이퍼는 해냈다. 누구도 믿기 힘들었던 결과를.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출처 : 라이엇 게임즈)


# 롤드컵을 꿈꾸던 한 소년



바이퍼의 첫 데뷔는 2017년 챌린저스 코리아에서 활동하던 '그리핀'에서였다.

당시 그리핀은 2017년 챌린저스 코리아 스프링 시즌만 하더라도 2라운드 전패 후 승강 위기까지 직면한 하위권 팀이었다. 반전은 서머 시즌 1라운드 막바지에서 '씨브이맥스' 김대호 감독을 영입하고 나서 시작됐다. 김대호 감독은 6월경 영입됐고, 바이퍼는 10월에 합류했다. 이후 2017 케스파 컵에서 로스터가 완성되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그리핀의 모습이 탄생했다.


2017 케스파컵 당시 그리핀의 로스터 (출처 : 한국e스포츠협회)



바이퍼는 당시에 여러 아마추어 대회에서 활약한 바 있는 천상계 출신 아마추어 선수였다. 데뷔 포지션은 원거리 딜러였다. 바이퍼는 이에 대해 "진이 처음 나왔을 때, 진에게 꽂혀 게임을 하다 보니 모스트가 됐다. 그러다 보니 원거리 딜러로 데뷔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후 그리핀은 2018년 챌린저스 코리아 스프링 시즌을 우승하고, LCK로 승격해 정규 시즌 2위에 오르며 모두가 익히 아는 "그리핀 신화"를 써 냈다. 이 당시 바이퍼의 강점은 "비원딜 숙련도"와 "안정성"이 꼽혔다.

당시 바텀 라인에서는 비원딜을 기용하는 메타가 유행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바이퍼의 비원딜 숙련도가 가장 높다고 평가받았다. 오죽하면 당시 원거리 딜러였음에도 불구 시그니처 픽이 "블라디미르"였다. 바이퍼의 LCK 블라디미르 통산 전적은 12승 1패다.

심지어 바텀 티모를 기용해 승리한 경기도 있었다. 그만큼 모든 챔피언을 안정적이고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선수였다.


2018 LCK 서머 시즌에서 티모 원딜을 꺼내든 바이퍼. 경기도 승리했다 (출처 : OGN)
 

그러나 좌절도 빠르게 찾아왔다. 승격 첫 시즌에 결승 무대까지 오른 그리핀의 상대는 "슈퍼팀" KT였다. 그리핀은 2:1 상황에서 KT를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이며 롤드컵을 목전에 뒀지만, KT 또한 저력을 보이면서 경기는 팽팽한 상태로 돌입했다.

그리핀은 끝내 자신들의 본진에서 KT의 챔피언을 모두 처치하고 에이스를 띄워내는 데 성공했지만, 쌍둥이 타워를 공격하던 중 바이퍼의 카이사가 궁을 앞으로 사용하고 타워를 공격하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며 4세트를 내 주고 말았다. 조금만 더 집중했다면 롤드컵 직행 티켓을 따낼 수 있었기에 더더욱 아쉬운 결과였다.


무리하게 타워를 공격하다 사망한 바이퍼. 앞 궁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분명 뼈아픈 실책이었다 (출처 : OGN)
 

결국 그리핀은 5세트에서 허무하게 패배하며 첫 우승을 놓치게 되고, 바이퍼의 로열로더 도전도 좌절되었다. 선발전에서마저 젠지 e스포츠에게 풀세트 접전 끝에 패배한 그리핀은 2018년 롤드컵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이후 준우승, 다전제와 바이퍼의 지독한 악연이 시작됐다. 그리핀은 2019년 스프링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했지만, 결승전에서 SKT를 상대로 "탈리야-판테온" 조합을 고수한 끝에 3:0으로 패배했다. 서머 시즌에서도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했지만, 또다시 SKT에게 3:1 스코어로 패배하면서 우승을 놓치게 된다. 그나마 이번에는 쌓아 놓은 포인트를 바탕으로 롤드컵 직행에 성공했다는 것이 위안거리였다.


당시에 큰 화제가 됐던 탈리야-판테온 조합. 그러나 SKT라는 방패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출처 : LCK)

# 그리핀 사태 이후의 내리막길

 
악재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핀은 김대호 감독이 롤드컵 직전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감독 없이 2019년 롤드컵을 시작하게 됐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리핀은 저력을 보여주면서 조 1위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8강 상대는 지난 시즌 롤드컵 우승팀 'IG'였다. 바이퍼는 3세트에서 자야를 픽해 펜타킬을 달성하며 분전했지만, 결국 1:3의 스코어로 패배하며 첫 롤드컵 무대를 마무리했다.


바이퍼의 펜타킬을 통해 저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결국 그리핀은 IG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출처 : LCK)
 

이후 그리핀은 내부 사정을 겪으며 팀원이 하나하나 떠나게 되었고,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바이퍼의 경기력도 날로만 떨어져 갔다. "팔방미인형 원딜러"는 어느새 "무색무취 원딜러"가 되었다. 그리핀은 롤드컵 진출 팀이 다음 스프링 시즌에서 강등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게 된다.

서머 시즌에는 환경이 좋은 한화생명e스포츠로 이적했으나, 올해 시작된 부진은 바이퍼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화생명e스포츠가 부침을 겪고, 바이퍼에 대한 캐리 부담이 가중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수비적이었고, 어떤 때는 너무나 공격적이었다. 솔로 랭크 순위는 여전히 높았고, 피지컬 또한 상당하다고 평가받았지만, 경기만 들어가면 상황이 꼬였다.


롤드컵 펜타킬 기록을 가진 원딜이, 단 한 시즌만에 강등권 원딜이 되고 말았다 (출처 : LCK)
 

한화생명e스포츠는 9위라는 성적으로 2020 서머 시즌을 마무리했다. 지난 시즌 롤드컵에서 펜타킬까지 달성한 원딜러에겐 너무나 뼈아픈 결과였다. 

시즌이 끝난 후 변화의 필요를 느낀 바이퍼는 과감히 FA를 선언했다. 시장에 나온 바이퍼를 눈여겨본 팀은 LPL의 EDG였다.
 

# EDG에서의 반전\, 세계 최고 원딜러로 거듭나다.

 
반전은 EDG로 이적하면서 시작됐다.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에서 얻은 교훈 때문이었을까, EDG로 이적한 바이퍼는 솔로 랭크에서 보여주는 공격성을 제대로 살린 원거리 딜러로 바뀌었다. 원거리 딜러가 힘을 쓰기 힘들다고 평가받는 메타에서, 바이퍼는 하드 캐리형 원딜러를 선택해 게임을 뒤집는 모습을 보여줬다. LPL 스프링 시즌 바이퍼는 카이사로 8승 1패, 자야로 8전 전승을 기록했다.

단 한 시즌 전만 해도 하위권 팀을 전전하던 원거리 딜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바이퍼가 보여준 괴물 같은 모습은 국내 커뮤니티에서도 화제가 됐다. 아쉽게도 스프링 시즌은 3위로 마감했지만, LPL 올 프로 퍼스트 원딜, 정규 시즌 MVP, 스프링 루키 상을 수상하며 3관왕에 올랐다. 수상할 수 있는 상은 전부 받은 셈이다.
 

한 시즌만에 추락했던 바이퍼는, 다시 한 시즌만에 날아올랐다 (출처 : LCK)
 

서머 시즌에는 더욱 놀라웠다. 정규 시즌을 2위로 마무리한 후 포스트시즌에서 'Team WE'에게 패배하며 패자조로 밀려났지만, '타잔' 이승용의 LNG를 3:1로 격파하며 불씨를 살렸다. 

결승전 상대는 '도인비' 김태상의 FPX였다. 쉽지 않은 상대였지만 바이퍼는 불리한 상황에서 "역대급 아펠리오스 캐리"를 선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3세트 용 둥지 앞에서 과감한 앞점멸을 통해 3:1 교전을 승리하는 장면은 "원거리 딜러의 로망"을 제대로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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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드컵 조별 리그에서는 LPL에서 보여준 공격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지만, EDG는 8강과 4강에서 풀 세트 접전 끝에 RNG와 젠지를 차례로 꺾으며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세계 최강의 팀으로 불리는 담원 기아. 맞 라인전 상대는 '구마유시' 이민형, '한스 사마' 스티븐 리브 등 하드 캐리 원딜러를 상대로 승리한 대표적인 안티 캐리형 원딜러 '고스트' 장용준이었다. 폼이 절정에 다다른 바이퍼라고 해도 쉬운 상대는 절대 아니였으며, 담원 기아 또한 바이퍼의 모스트 픽을 계속해서 밴하며 꽁꽁 묶었다.

그러나 이런 견제도 바이퍼를 완벽히 막아낼 순 없었다. 이번에도 아펠리오스였다. 마지막 5세트에서 바이퍼는 자칫 불리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쇼메이커' 허수의 적군 와해를 점멸로 뛰어넘는 슈퍼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게임에 종지부를 찍었다. 만약 적군 와해를 맞고 빈사 상태에 빠졌거나, 교전에서 패배했다면 유리했던 게임이 뒤집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유리함을 굳힌 EDG는 5세트를 승리하고 2021년 소환사의 컵을 들어 올렸다.
 

쇼메이커의 적군 와해를 과감한 앞 점멸로 피한 바이퍼. 담원 기아의 마지막 희망마저 꺼트린 플레이었다. (출처 : LCK)
 

세 번의 준우승, 승강전에서의 패배. 자신의 실수로 인한 롤드컵 진출 좌절. 8강에서 고배를 마셨던 첫 롤드컵까지. 수없는 실패를 겪었던 바이퍼는 EDG 이적 후 한 해만에 모든 불운을 이겨내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8강, 4강, 결승전 모두 풀 세트 접전이었다는 점도 의의가 있다. 다전제만 가면 부침을 겪던 원거리 딜러가 풀 세트 접전에서 내리 승리하며 자칭 "5꽉의 신"이 되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에는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끝없는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바이퍼는 이 말을 정확히 지켰다. 그렇게 "강등권 원딜러"는 1년 만에 "세계 최고 원딜러"로 거듭났다.
 

(출처 : 라이엇 게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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